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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아버지 고향 식당 박준철 어머니 나이 키 부모 출생지 남편 결혼

johie 2022. 9. 9. 17:49

'아빠를 부탁해' 박준철·박세리, 이처럼 흥겨운 부녀가 또 있을까
이나래 기자입력 2015.10.19.

‘아빠를 부탁해’ 박준철과 박세리가 여행을 떠났다.

과거에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아빠를 부탁해’(이하 ‘아빠를 부탁해’)에서는 박준철과 박세리가 대구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이날 이들은 기차에 타기 전 주전부리를 구입했다. 박준철을 빵을 구입했고, 박세리가 “김밥도 사지”라고 말하자 “난 빵이 더 좋아”라며 빵사랑 먹둥파파의 모습을 보였답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박세리는 셀카봉을 꺼내며 사진을 찍자고 했고 박준철은 기뻐하며 “우리 랩으로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추억을 남기기 위해”라며 특유의 플로우를 탔고 이는 웃음을 자아냈다.

방송을 마친 박세리는 박준철에게 “사진 보내주겠다. 보기는 보느냐”고 물었고 박준철은 “본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박세리가 메신저를 확인하니 메시지 확인이 하나도 안 되어있었다. 그는 “보내준 게 그대로 있다”며 “아빠 왜 안 봐”라고 물었다.

박세리는 “사진 저장도 안 했지”라고 물었고 하나하나 저장해줬다.

이들은 동대구역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인증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이어 2층 버스를 발견한 박세리는 “한국에서도 이런 것 탈 수 있구나”라며 “런던 같아”라고 신기해하며 탑승했다.

박준철과 박세리는 재래시장에 방문했다. 이 둘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장상인들은 모두 “정말 예쁘다”며 인사를 건넸다.


박세리는 개인인터뷰를 통해 “화면에서 내가 얼마나 못생기게 나오길래 ‘살이 많이 빠졌다’ ‘왜 이렇게 예쁘냐’는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고 밝혔답니다.

박세리는 아빠 박준철과 첫 여행이라고 밝혔으나 어색함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녀이면서 친구 같은 이들은 여행을 통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 프로필 경력 이력

출생 나이 생일
1977년 9월 28일 (44세)

고향 출생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송정리
신체 키 혈액형
170cm, 67kg, O형

가족관계
아버지 박준철, 어머니 김정숙, 언니, 여동생

반려동물
반려견 모찌(2017년생, ♀, 보스턴 테리어)
반려견 찹쌀(2019년생, ♂, 포메라니안)
반려견 시루(2020년생, ♂, 믹스견)

학력
유성초등학교 (졸업)
갈마중학교 (졸업)
금성여자고등학교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데뷔
1996년 KLPGA 입회
소속
SBS Golf 해설위원 (2017~ )

종교
불교(법명: 묘법)

-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에서 활약한 프로 대한민국의 前 골프 선수이자 現 골프 감독이랍니다

1977년 9월, 광주광역시에서 아버지 박준철의 3녀 중 둘째로 출생했고, 생후 열흘 만에 대전광역시에서 이주해 자라 고향은 대전이다.

어렸을 때 육상을 시작으로 스포츠에 입문했다. 1989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싱글 핸디캐퍼였던 골프광 아버지 박준철 씨에 이끌려 골프를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훈련장에서 새벽 2시까지 혼자 남아 훈련을 하는 등 쉬는 날 없이 엄격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US Women`s Open에서 우승하며 국민적 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 아니카 소렌스탐 - 캐리 웹과 함께 여자 골프 시장을 삼등분 하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현재 세계를 누비는 한국의 여성 골퍼들에게 영감을 준 선수이며, '상징적'인 면에서 앞으론 어떤 선수가 등장해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2016년을 끝으로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으며 현재는 SBS Golf 해설 위원이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하였으며,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 또한 수행하였답니다.

- 은퇴 이후의 행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국가대표팀의 여성 팀 감독으로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참고로 남성 팀 감독은 최경주가 선임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골프 국가대표팀의 목표는 포디움을 휩쓰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하였다.

박세리의 지도의 덕분인지, 박인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박인비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박세리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박인비의 금메달을 이끌어내면서,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2016년 10월 13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오션코스에서 열린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대회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역시 1990년대 말~2000년대 한국 스포츠의 개척자로서 함께 국민적 성원을 받았던 전(前)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박찬호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답니다.

- 박세리 키즈

1998년 박세리가 LPGA에 도전하며 상당한 성과를 내자, 이를 보고 골프에 입문했던 꼬마들에게 붙어 있는 이름이다. 줄여서 '세리키즈'라고도 부른다.

박세리는 동시기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투수 박찬호와 함께,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초유의 국가적 재난 속에서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국민들에게 힘과 희망을 심어준 국가대표급 영웅으로 남았다. 이 점에서 그녀가 가진 위상은 매우 특별하며 피겨 스케이팅에 김연아와 연아 키즈가 있듯, 한국 여성골프엔 박세리와 세리 키즈라는 말이 생겨났다.


일단, 박세리가 성공적으로 LPGA에 데뷔하자, 라이벌 김미현을 비롯하여, 박지은, 한희원 등도 LPGA 에 도전하였고, 대회에서 우승을 따내는 등 활약을 하였다. 박세리로 시작된 여러 한국인 여자 골퍼들의 활약은 골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어린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골프의 인기가 크게 올랐다.

박세리 키즈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지만, 대략 박세리가 데뷔했을때 10살 정도의 나이였던 1988년생 근방에 태어난 여자 골프 선수들을 지칭한다. 박세리는 그런 후배들을 이끌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은 것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더 크다고 할 수 있답니다.

아빠를 부탁해' 박세리, 아버지 결혼 언급에 울컥 "짝 없어 시집 못 간다"
- 2015.09.07

‘아빠를 부탁해’에서 골프선수 박세리가 결혼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6일 오후 방송한 SBS 예능 프로그램 ‘아빠를 부탁해’에는 박세리-박준철 부녀가 새롭게 합류했다.

이날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은 “주변에서 딸 결혼에 대해 묻는다. 딸이 일이 많아 결혼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털어놨다.

이에 박세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며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해야지, 아빠가 그러면 안 돼”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어 그는 “다들 짝이 있는데 왜 내 짝만 없는지 모르겠다”며 “(시집을) 가고는 싶은데 짝이 없어 못 간다”고 아쉬운 소리를 했다.

이후 박준철은 제작진과 인터뷰를 통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세리가 불편했나 보다. 그래서 구박받았다”고 털어놔 웃음을 안겼다.

한편 이날 ‘아빠를 부탁해’에는 하차한 강석우 강다은 부녀, 조민기 조윤경 부녀의 빈자리를 이덕화 이지현 부녀, 박준철 박세리 부녀가 매꿨다.

'옥문아' 박세리 밝힌 연애관 "장거리 OK, 결혼은 정말 노"
- 2021.12.22

'리치 언니' 박세리가 연애관에 대해 밝혔다.

12월 21일 방송된 KBS 2TV 예능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이하 옥문아)에는 골프계 살아있는 전설 박세리가 출연했다.

이날 송은이는 박세리에게 "요즘 예능에 많이 출연하면서 젊은 친구들도 많이 알아본다고 하더라"고 말을 건넸다. 이에 박세리는 "맞다. 선수 때는 종목 자체가 부모님, 어르신 세대가 하는 스포츠다 보니 연령층이 높았다. 이제는 (좋아해주시는) 연령대가 굉장히 낮아졌다"며 웃었다.

이어 박세리는 '리치 언니'라는 별명에 대해 "처음에는 되게 부담스러웠다. 제 가치관 자체가 여유롭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별명이었다. 그런 의미의 리치는 마음에 들지만 '부' 이런 의미로 지어진 건 아니다"고 털어놨다.

박세리는 한국인 최초 LPGA 상금 1천만 달러를 받은 선수. 1천만 달러는 지금으로 따지면 약 120억 원이다. 박세리는 "상금을 어디에 제일 많이 썼냐"는 물음에 "세금으로 제일 많이 나갔다. 세금 빼고 경비 빼고는 부모님께 다 드렸다"고 답했다.

박세리는 "어머니를 위해 최대 플렉스를 한 적 있다고 들었다"는 말에 "미국에서 선수 생활할 때 해드린 거다. 여자들은 반짝반짝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나. 저는 항상 뭘 해드릴 때 기왕 하는 거 좋은 걸 해드린다. 엄마 선물을 하는 데 1년 반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이어 "다이아몬드 5캐럿 반지를 해드렸다. 최상품으로 찾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반 전문가처럼 하나하나 다 봤다. 어머니께서 너무 좋아하셨는데 안 차시더라"고 말해 놀라움을 안겼다. 또 "아버지에게도 거기에 맞춰서 해드렸다. 아버지가 멋쟁이라 시계를 해드렸다"며 "부모님이 고생하셨으니 당연히 해드리는 거다. 가족에게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덧붙였답니다.

특히 박세리는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부모님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세리는 "제가 골프를 막 시작했을 때 아빠 사업이 되게 힘들었다. 그런데 제가 골프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됐으니 저 모르게 도움을 청하러 많이 다녔던 것 같다. 우연치 않게 차 안에서 본 장면이 있다. 부모님이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는데, 돈을 갚는 게 며칠 늦어졌던 것 같다. 그쪽에서 매몰차게 대했는데, 저는 그게 큰 충격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박세리는 "그때 마음을 먹었다. 꼭 성공해서 우리 엄마 아빠 눈에 눈물 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좀 독하게 했다. 중학생 때 엄마한테 '돈방석에 앉아서 셀 수도 없게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답니다.

연애관도 밝혔다. "연예인에게 대시 받은 적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한 박세리는 "마지막 연애가 5년 전, 은퇴 직전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김숙은 "남자친구가 늘 있었다고 들었다"는 말을 건넸고, 박세리는 "선수 생활할 때는 늘 있었다. 미국에 있던 재미교포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다"며 "저는 장거리 연애를 좋아한다. 평소에는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만나서 며칠 재밌게 노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연애 시절 애칭이 '자기'였다고 밝힌 박세리. 그는 "외롭지 않냐"는 물음에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상형에 대해서는 "친구 같은 사람. 자기 일이 확실히 있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과거 정우성을 이상형으로 꼽았던 박세리는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좋다"고 설명했다.

또 박세리는 "인터넷에 제 이름을 치면 '이혼'이 나온다. 제가 예전에 고(故) 앙드레김 선생님 패션쇼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었는데, 그걸 보고 이혼이 뜨는 것 같다. 식장에 들어갔으면 덜 억울하지"라며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박세리는 "결혼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는 "노(NO)"를 외쳤다. 그는 "제가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구속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선수 보다 인간 박세리로"..'밥은 먹고 다니냐' 박세리, 여전히 빛나는 골프 여제 [핫TV]
- 2020.01.21.

박세리가 근황을 전하는 동시에 숨겨뒀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20일에 방송된 SBSplus '김수미의 밥은 먹고 다니냐'에서는 골프선수에서 감독, 와인CEO로 변신한 박세리가 출연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날 김수미는 박세리를 위해 낚지볶음, 보리굴비를 준비해 눈길을 끌었다. 박세리는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걱정이다. 은퇴하고 10kg이 쪘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수미는 "맛있게 먹고 운동해라. 나는 6끼를 먹어도 안 찌는 체질"이라고 자랑해 웃음을 자아냈다. 

김수미는 보리굴비 가시를 손수 발라줬다. 음식을 맛 본 박세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박세리는 "집에 메인 인테리어가 트로피다"라고 말했답니다

박세리는 "US오픈 때 유명해졌는데 그 전에 메이저 대회가 있었다. 그때 이미 우승을 했는데 US오픈 때문에 그 부분이 가려졌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수미는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떠올렸다. 김수미는 "그때 그 시합을 보고 많이 울었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그때 샷 하나가 굉장히 많은 의미를 줬다"라며 "그땐 한국이 어딨냐고 골프장이 있냐고 물어보는 외국인도 있었다"라고 말했답니다

윤정수는 "국민 영웅으로 살아간다는 게 힘들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이에 박세리는 "처음엔 힘들었다. 그땐 나이도 어렸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박세리는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근데 유명인이 되고 나니까 어딜가도 관심을 받았다. 어딜 가도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이 다칠까봐 걱정이 됐다. 그땐 경호원들과 같이 다녔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편하게 다니니까 팬분들도 달라졌다. 이해도 많이 해주셔서 다닐 때 불편한 게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날 박세리는 "내 검색어를 치면 결혼, 이혼, 재산이 나온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박세리는 "기사만 보면 상금만 200억 좀 안되는 것 같다. 상금 말고 스폰서 계약한 돈도 큰데 나는 부모님께 다 드려서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부모님이 일찍 결혼하셔서 일찍 결혼하는 걸 반대하셨다"라며 "나는 아버지랑 굉장히 친해서 사람들이 아버지가 결혼하는 걸 막는다고 오해하더라"라고 말했다. 

이진호는 "박세리가 주폭이 심하다는 루머가 있다"라고 말해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박세리는 "그런 얘기 처음 듣는다. 만든 거 아니냐"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답니다

박세리는 "나는 애주가다. 술을 많이 먹진 않는데 술자리를 좋아한다. 주량이 넘으면 내가 마시는 게 아니라 계속 마신다. 마시다 보면 테이블을 다 붙인다. 센스있는 알바생들한테 같이 마시자고 얘기도 잘 한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박세리는 자신의 꿈을 밝히며 "아시아에서 LPGA를 개최하려고 한다. 한국을 보며 다른 아시아권에서 골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LPGA를 아시아권에서 만들어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이날 출연비 조차 기부를 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박세리는 "최고의 선수가 아닌 인간 박세리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자신의 꿈을 밝혔다. 

<골프와 나>박세리 "남자로 태어나면 우즈와 맞짱..명예의전당 입성때 가장 행복"
- 과거 인터뷰 내용

한 언론이 매주 값진 인생을 가꾼 인물의 골프 이야기를 전한 지 1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지난 2009년 12월 ‘나의 골프 이야기’로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이번 주 500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과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골프의 대명사인 박세리입니다.

한국 골프의 전설 박세리(43) 감독은 요즘 선수 때보다 갑절이나 바쁘다. 박 감독을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오피스에서 만났다. 이곳은 여자골프 국가대표 감독인 그가 지난해 말 만든 회사 ‘바즈인터내셔널’이 임시로 사용하는 공유 오피스다. 박 감독은 “선수 땐 골프장과 연습장, 숙소를 오갔지만 지금은 이곳저곳 다닐 데가 참 많다”고 말했답니다ㅣ

박 감독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지난해 말 회사를 설립했다.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요즘도 ‘객지’에서 지내는 날이 많다. 대전 집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려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서울에 와 주로 호텔에 머문다. 박 감독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를 쫓아다닐 때와 비슷하지만, 지금은 짐 싸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바즈인터내셔널을 통해 예전의 와인 사업뿐 아니라 ‘박세리 브랜드’를 접목한 의류 등 여러 사업을 구상 중이랍니다.

올해 출범한 ‘아시아 골프 리더스 포럼(AGLF)’ 이사진에 합류한 그는 ‘박세리 희망재단’과 함께 해온 2개의 주니어대회는 물론, 아시아 지역 주니어대회도 추진하고 있다. 주말엔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고 대전 집에 머문다는 박 감독은 몇 해 전 새 건물을 지어 언니, 동생과 층을 나누어 쓰고 있다. 집 인테리어는 직접 손봤다. 근처 아파트에서 주말이면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다. 박 감독은 4개 안팎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출연 섭외가 계속 오고 있지만,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다. 박 감독은 최근 요리 프로그램에서 요리사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는 칭찬을 들었다. 집에서도 직접 음식을 마련하곤 한다. 박 감독은 “자신 있는 요리는 돼지고기 볶음이지만, 간혹 스파게티도 즐긴다”면서 “은퇴한 뒤 본격적으로 골프 중계 해설을 맡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올해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마이크를 한 번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답니다

박 감독에게 모처럼 추억여행을 주문했다. 박 감독에게 가장 의미 있는 우승은 1998년 US여자오픈. 당시 그의 우승은 외환위기에 빠진 전 국민의 시름을 덜어주었고, 그는 ‘국민 영웅’이 됐다. 최종 라운드까지 태국계 미국인 아마추어 추아시리폰과 동타였다. 다음날 18홀 연장전을 치러야 했다. 연장전이 오전 8시부터 열리기에 전날 일찍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4라운드 내용을 복기했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18홀을 돌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됐다. 박 감독은 “잠깐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고 대회장으로 서둘러 나갔다”면서 “18홀 연장전으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2홀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서든데스 승부로 바뀌면서 박 감독의 기록은 지금까지 최장 연장 승부로 남아있답니다

박 감독은 “그간의 오해를 풀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박준철)가 담력을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로 그를 보냈다는 일화를 꺼냈다. 박 감독은 “한 번 와전된 얘기가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된 케이스”라고 말하면서 ‘팩트’를 전했다. 박 감독은 “골프를 시작한 뒤 중학생 시절부터 유성CC에서 연습했다. 아침에 아버지가 연습장에 내려주고 일을 보러 가셨다. 공을 치다가 쉬고, 라운드 나가고. 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그런데 연습장 문 닫아야 할 시간, 밤늦도록 아버지가 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혼자 골프 백을 메고 집으로 가면서 포장도로 대신 11번 홀 등 2개 홀을 가로질러 다녔다. 10분을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코스엔 불빛 하나 없었고 홀과 홀 사이에 무덤도 여러 개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밤에 무덤을 봤다. 무서웠다’고 말했다. 훗날 인터뷰 과정에서 이게 와전됐다”고 설명했답니다

박 감독의 선수 시절 징크스는 딱 하나.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연습 라운드를 하면 이상하리만큼 스코어가 나오지 않았다. 연습 라운드에선 언더파는 고사하고 오버파를 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며 조심스럽게 대회에 임했다. 늘 ‘우승보다는 라운드마다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첫날보다 2, 3라운드가 더 좋고 마지막 날엔 펄펄 날곤 했다. 연습 땐 잘 맞지 않았지만, 경기 땐 좋은 결과가 나왔고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붙어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다 보니 간신히 컷을 통과하곤 역전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아졌고 ‘연장불패’ 신화를 썼다. 그는 LPGA투어 25승 중 6승을 연장전에서 거뒀답니다.

박 감독은 선수 시절 쳇바퀴 돌듯, 숙소와 대회장을 오갔다. 선수가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한 번도 벗어나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목표였던 박 감독은 7년 만에 꿈을 이뤘다. 호사다마일까. 2004년 5월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우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마지막 27번째 포인트를 확보한 뒤 슬럼프가 찾아왔다. 미켈롭울트라오픈 정상에 오른 뒤 국내로 돌아와 초청선수로 출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샷 결과가 좋지 않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출전했던 대회에서 컷 탈락했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대회에서도 부진했다. 원인을 찾지 못했다. 꿈을 이룬 이듬해, 그러니까 2005년엔 톱 10에 한 번도 들지 못했다. 나비스코챔피언십 공동 27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컷 탈락 3차례와 기권 4차례라는 수모를 겪었다. 그만큼 부상도 잦았다. 골프밖에 몰랐던 그는 이렇게 2년여 동안 ‘멘붕’에 빠졌다. 원인을 찾고 또 찾았지만 허사였다. 올랜도 집 근처에서 친분을 쌓은 교민 부부 덕분에 고민을 해결했다. 교민 부부는 “함께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박 감독에게 제안했고, 차로 2시간 달려 낚시를 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골프클럽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퍼터를 매만지면서 잠들곤 했고, 골프 백은 늘 침대 곁에 두고 잤다. 박 감독은 낚싯대를 잡았지만, 머릿속은 골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낚시는 달랐다. 물고기가 잘 잡히면서 낚시에 열중했고, 처음으로 골프를 잊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박 감독은 “아! 이거구나”라며 무릎을 쳤다. 골프가 안 될 때는 이렇게 쉬는 게 정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 감독은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돼 재기했다”면서 “2006년 6월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 캐리 웹(호주)을 꺾고 통산 5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안았고, 2년 1개월 만에 부진에서 탈출했다”고 말했답니다

긴 슬럼프에서 벗어났지만, ‘골프여왕’의 위력은 줄어들었다. 2007년 7월 코닝클래식 우승이후 3년이 지난 2010년 벨 마이크로 LPGA클래식에서 25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컵을 품었다. 서서히 그의 마음에서 골프가 떠나고 있었다. ‘쉬지 못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박 감독은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는 여유가 있었다면 선수생활을 몇 년 연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LPGA 입회 10년째이던 2007년 11월 최연소(30세)로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오거스틴의 세계골프 빌리지에서 열린 명예의 전당 입회식.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소감을 밝히던 중 처음 골프채를 잡았던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답니다

박 감독은 “4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처럼 이번에도 도쿄올림픽 코스 사전답사를 마쳤지만, 1년 연기돼 아쉽다”고 말했다. 골프는 감독의 역할이 한정된다. 선수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게 골프 감독의 가장 큰 업무.

박 감독은 4년 전에도 열성적으로 국가대표들을 지원했고, 금메달(박인비)의 밑거름이 됐다. 박 감독은 “여자골프의 올림픽 2연패는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감독은 “요즘은 내가 골프를 배웠던 시기의 환경과 너무 다르고, 업그레이드가 됐기에 특별히 후배들에게 건넬 조언은 없다”면서도 “굳이 한마디 한다면 ‘멀리 보고 가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만일 남자로 태어난다면 골프선수가 돼 타이거 우즈(미국)와 겨루고 싶고, 결혼 후 자녀가 골프를 원한다면 안 된다는 대답 대신 재능을 살펴본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의 공식대회 홀인원은 딱 한 번뿐이다. 연습 라운드 등 비공식 홀인원은 3차례 더 있다. 앨버트로스는 LPGA 퀄리파잉스쿨 예선 파 5홀에서 경험했다. 우드로 친 샷이 그대로 들어갔답니다.

박 감독은 미국에서 활약하면서 사용했던 물품을 컨테이너에 고스란히 싣고 귀국해 대전 집에 보관해두고 있다. 골프를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한 골프채도 간직하고 있다. 박 감독은 “풀세트로만 따지면 100세트 분량이 넘을 것”이라면서 “훗날 내 이름을 건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따로 만들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박 감독은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미국 진출 이후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외로운 투어 생활에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다른 연인들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 통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박 감독은 “얼마 전까지 교제했지만, 그가 ‘골프선수 박세리의 남자’라는 사실을 부담으로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부터 정치 입문 요청을 받았다는 박 감독은 이번 4·15 총선에서도 출마 권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 감독은 “그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분명하게 거절했다”면서 “기회가 되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젠간 골프 관련 협회에서 ‘골프행정가’로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 감독은 “골프는 어려울 때나, 즐겁고 기쁠 때나 항상 내 곁에 있는 훌륭하고 믿음직한 친구”라면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박세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